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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 우리는 언어의 틀 안에서만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

  단어가 가지는 의미의 폭은 언어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흔히 '물건'이라는 실체가 있고, 그에 맞는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물건의 체계와 언어의 체계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비'라는 말과 '나방'이라는 말에 익숙한 나머지 원래부터 나비와 나방이라는 두 종류의 곤충이 있어서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프랑스어에는 나비와 나방의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papillon, 빠삐용>이라는 단어밖에 없다고 한다. 즉, 프랑스 문화권에서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해 사용하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더 넓은 폭을 나타내는 <빠삐용>이라는 단어로 정의되어 있다.

 

프랑스인에게는 '나비'라는 개념도, '나방'이라는 개념도 없고, 오직 두 가지를 하나의 집합으로 인식하는 <빠삐용>이라는 전혀 다른 개념만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빠삐용>이라는 프랑스어에 대응하는 개념이 한국어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개념"이라는 것은, 그 것이 정해지고 내용을 포함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서 다른 말과의 관계에 의해 결여된 관념으로 정의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개념의 특성은 "다른 개념이 아니다"라고 볼 수 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다쓰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스위스의 언어학자이자 언어 철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이렇게 정의했다.

  - 시니피앙(signifiant) : 개념을 나타내는 언어

  - 시니피에(signifie) : 언어에 의해 표시되는 개념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나비와 나방이라는 두 개의 시니피앙을 이용해 두 가지 시니피에를 나타내는 반면, 프랑스어에서는 빠삐용이라는 시니피앙을 이용해 한국어의 나비도, 나방도 아닌 둘을 합친 시니피에는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언어 시스템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해서 사고한다. 그런데 이 언어 자체가 이미 무언가의 전제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는 우리를 자유롭게 사고하도록 하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 언어가 의지하고 있는 틀에 사고를 의지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고,

생각은 언어가 의거하고 있는 무언가의 구조에 의해 불가피하게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사고의 폭을 넓히려면 어휘력을 길러라

 

소쉬르가 지적한 것과 같이 어떤 개념의 특성이 다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면, 더 많은 시니피앙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세계를 더 세심하게 분별하여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시니피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니피에를 파악하는 일로 이어진다. "개념"이라는 단어만 알고 있는 사람은 단어의 의미에 내포되어 있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나누어 인식할 수 없지만, '시니피앙'이라는 개념을 인지함으로써 세상을 세밀하게 파악하는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의 틀에 의해서만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 한층 더 정밀하게 세상의 현상과 이치를 파악하려 한다면, 언어의 한계를 인지하고 더 많은 언어, 즉 시니피앙을 조합함으로써 정밀하게 시니피에를 그려내려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著>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