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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언어의 온도>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몇 해 전, 아마 이 책은 모든 서점의 베스트셀러 진열장을 장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좋아하는 보라색에 세로 원고지에 적힌 제목이 너무나 취향저격이었기에

나 역시 바로 책을 집어 들어보았지만

당시의 내게 에세이집의 내용은 닿지 않는 말들이었다.

 

떡볶이라면 가장 매운맛에 소시지 추가, 영화라면 자본이 눈에 보이는 액션, 

한창 자극적인 것을 찾던 당시의 내 눈엔 아마 이 잔잔한 울림이 다가오지 않았나 보다.

 

얼마 전 동기의 결혼식에 갔다가 시간이 남아 중고 책방에 들렀다.

한 켠에 꽂혀있던 <언어의 온도>

여전히 나의 표지 취향은 변하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나이를 서너 해 먹고 다시 읽게 된 첫 번째 에피소드는 어쩐지 먹먹한 울림이었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들 사이에 고요히 건네지는 따스함이었다.

 

책 취향이 변한 건가 싶었는데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만큼 나의 아집과 고집이 조금 내려진 것뿐인 것도 같다.

 

 


p. 18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p.24

 

"여보, 사람들 많으니까 이어폰 끼고 보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 맞다. 알았어요. 당신 말 들을게요"라고 대답했다.

...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단신 말 들을게요"라는 어르신의 한마디가 내 귀에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문장으로 들렸다.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사랑의 본질이 그렇다. 사랑은 함부로 변명하지 않는다. 

 

 

 

p. 36

 

어르신이 내린 차량의 뒷좌석에서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뒤 어르신은 문을 열어젖힌 다음 두 팔을 벌려 할머니를 살포시 안았다.

 

그 모습은 마치 "세월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p.68 

 

그들은 위로를 정제한다. 위로의 말에서 불순물을 걸러낸다고 할까. 단어와 문장을 분쇄기에 넣은 뒤 발효와 숙성을 거친 다음 입 밖으로 조심스레 꺼내는 느낌이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p. 79

 

다들 꿈을 잃어버렸다고 자조하기 분주한 세상이지만,

그 친구만큼은 본인이 내뱉은 말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녀석은 말했다.

 

"기주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아..."

 

 

 

p. 171

 

사실 유머(humor)와 개그(gag)는 조금 결이 다른 개념이다.

개그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끼워 넣는 즉흥적인 대사나 우스개를 뜻한다. 웃기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 

유머는 그렇지 않다. 익살과 해학의 희로애락이 적절히 뒤범벅된 익살스러운 농담을 의미한다.

유머 앞에서 우리가 왁자지껄 웃어젖히다가도 어느 순간 씁쓸한 눈물을 쏙 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유머는 남을 웃기는 기술이나 농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머는 한 사람의 세계관의 문제다"

 

 

 

p. 182

 

영화나 동화 속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때때로 무기력하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랑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p. 222

 

그 눈빛에서 난,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비장함, 패배에서 승리의 요인을 찾겠다는 열의를 보았다. 

내가 만약 취재기자였다면 조금 다르게 기사를 작성했을 것 같다.

 

"이 구단은 오늘 아주 중요한 삶의 이치를 증명했습니다.

지는 법을 알아야, 이기는 법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p. 267

 

"나이를 결정하는 건 세월일까, 생각일까?"

"늙는다는 건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 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p. 272

 

리더의 덕목이 뭘까? 영국의 한 경제학자는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야말로 리더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 다만 머리로만 이해될 뿐 내 가슴에는 와닿지 않는 얘기다.

 

 

 

p. 306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